예술과 불꽃이 만나는 발렌시아의 환상 축제, 파야스 데 발렌시아
스페인 발렌시아의 도시를 태우는 불의 예술제
매년 3월 중순, 스페인 발렌시아는 거대한 예술 조형물과 함께 불로 타오른다. ‘파야스(Fallas)’라 불리는 이 전통 축제는 발렌시아 지역의 수호성인 ‘성 요셉’을 기리는 행사로 시작되었으며, 지금은 예술, 정치 풍자, 불꽃놀이, 퍼레이드, 공동체 정신이 결합된 유럽 최대의 거리 축제로 발전하였다. ‘파야(Falla)’라는 단어는 원래 목재로 만든 횃불을 의미하며, 중세 시기 목수들이 낮이 길어지는 춘분을 앞두고 사용하던 목재 받침대를 불태운 것에서 유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조형물로 발전했고, 현대에는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수개월에 걸쳐 준비한 수십 미터 높이의 ‘니노트(Ninot)’라는 인형 조형물이 도시 곳곳에 설치된다. 이 조형물들은 풍자와 유머가 가득 담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축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치·사회 이슈에 대한 발렌시아 시민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니노트들은 단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의례적 소각’의 대상이기도 하다. 축제의 마지막 날인 3월 19일 밤, ‘라 크레마(La Cremà)’라 불리는 의식에서 이 조형물들은 하나하나 불에 태워진다. 이는 창조와 소멸, 예술과 의식의 융합이며, 불을 통해 과거의 문제를 정화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야스는 단순히 지역 주민의 행사로 그치지 않고,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국제적인 축제로 성장했다. 유네스코는 이 축제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그 독창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파야스 축제를 구성하는 예술, 불, 공동체의 삼중주
파야스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장대한 문화 서사를 이룬다. 이 축제의 핵심은 ‘니노트(Ninot)’라 불리는 조형물이다. 각각의 니노트는 목재, 스티로폼, 종이, 천 등으로 정교하게 제작되며, 사회 풍자적 주제를 반영한다. 유명 정치인, 세계적 스타, 사회적 문제 등이 캐리커처 형태로 구현되어 시민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이 니노트들은 축제 기간 동안 시내 곳곳에 전시되며, 가장 우수한 작품은 투표를 통해 ‘인디울타블(Indultado)’로 선정되어 박물관에 영구 보존된다. 나머지 조형물들은 마지막 날인 ‘라 크레마’ 때 불태워지며, 이 장면은 파야스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특히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와 함께 타오르는 거대한 조형물들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또한, 매일 진행되는 ‘마스클레타(Mascletà)’는 발렌시아의 전통 화약 폭죽쇼다. 낮 2시 정각에 진행되는 이 이벤트는 단순한 시각적 불꽃놀이와는 달리, 청각과 진동 중심의 체험형 폭죽쇼로, 수천 발의 폭죽이 리듬감 있게 터지며 도시 전체가 진동에 휩싸인다. ‘오프렌다 데 플로레스(Ofrenda de Flores)’는 또 다른 주요 행사이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성모 마리아에게 꽃을 바치는 이 행렬은 종교적 경건함과 공동체 연대를 함께 보여준다. 축제 기간 동안 발렌시아 시민들은 전통 복장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각자의 지역 단위 커뮤니티인 ‘카사예스(Falla Casales)’ 중심으로 문화 행사, 댄스, 요리 대회 등을 함께 즐긴다. 이러한 공동체 중심의 구조는 파야스를 단순한 축제가 아닌 ‘도시적 문화 네트워크’로 만들며, 지역의 자긍심과 예술적 역량을 극대화한다. 또한 도시 전체가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구조이기에 파야스는 발렌시아 주민들에게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선 ‘삶의 일부’이자 ‘자기 정체성’의 구현이 된다.
불로 피우는 공동체 예술의 정수
파야스 축제는 단지 조형물을 불태우는 행위가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 예술적 창의성, 공동체 연대를 동시에 구현하는 복합적 예술이다. 이 축제는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불의 의례’이며, 예술과 사회 풍자가 만나는 공공의 장이기도 하다. 매년 반복되는 ‘소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상징하며, 인간 존재의 순환적 리듬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파야스는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며, 각 카사예스의 기획, 모금, 제작 활동이 수개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는 도시민들이 공동의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는 민주적 구조를 반영하며, 예술이 어떻게 공동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파야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 축제는 관광 산업과 도시 브랜딩 측면에서도 막대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백만 명이 찾는 이 축제는 발렌시아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고 있으며, 도시의 경제적 활력을 유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동시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무형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이 축제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파야스는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불의 정화, 예술의 창조, 공동체의 연대라는 세 가지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독보적인 축제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축제’가 어떻게 공동체 문화의 정수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라 할 수 있다.